앙스타 통합 온리전 [몽소예고]에서 배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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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미네 미도리, 2학년이 되었습니다. 사실, 낯선 2학년 교실에 자리를 잡은 지는 벌써 며칠 됐는데, 아직 제대로 실감이 나지 않는달까. 학년이 올라가면 작년의 나보다는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남들에게 말하지 않은 작은 기대가 있었지만, 변한 거라곤 키가 조금 컸다는 것뿐. 그것도 별로 반갑지 않은 변화이기에 미도리는 오늘도 우울하다.
“다녀오겠습니다….”
“아들, 잘 다녀와-!”
아침부터 축 처져 힘이 없는 목소리와는 달리 일하시는 중에도 활기찬 엄마의 목소리에 미도리가 고개를 끄덕인다. 구름 몇 개 보이지 않는 맑은 하늘과 덥지도 춥지도 않은 선선한 날씨. 오늘도 제발 큰 문제 없이 조용히 마칠 수 있기를 바라는 미도리였다.
☆
“좋은 아침임다, 미도리 군!”
“미도리 군, 좋은 아침이오!”
“응. 테토라 군, 시노부 군… 아침부터 활기차네….”
그렇게 늦은 시각이 아니었는데도 벌써 교실에 도착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테토라와 시노부가 미도리에게 아침 인사를 건넨다. 1학년 때는 혼자 다른 반이었던 시노부를 포함해 유성대 멤버들과 함께 보내는 1년이었다. 벌써 몇 번이나 2학년 교실에 들어와 새로운 책상에 앉았지만, 아직 익숙해지지 않아 그런지 매일 아침 기분이 이상했다. 그래도 1학년 때와는 달리 아는 얼굴들이 많아 그렇게까지는 불편하지 않았지만. 아… 빨리 시간이 흘러 하교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 어서 집에 가고 싶어….
“오늘 유성대 연습 있으니까 바로 집에 가면 안 댐다.”
그런 미도리의 마음을 어떻게 안 건지 대각선 자리에 앉아있던 테토라가 단호하게 말한다. 움찔, 어떻게 알았냐는 시선을 보내자 옆에 있던 시노부가 입을 가리고 히힛 웃는다.
“미도리 군 얼굴로 마음이 다 보였소!”
요즘 수련을 열심히 했더니 표정을 읽는 능력이 생긴 것 같소이다! 뿌듯한 표정으로 말하는 시노부가 귀엽다. 시노부 군이랑 같은 반이 되어서 다행이야…. 학교에 있는 시간 대부분을 어렵다, 우울하다고 말하는 미도리였지만 마스코트 캐릭터처럼 작고 귀여운 반 친구들을 보면서 조금씩 힘을 얻는달까. 대놓고 말하면 화를 내겠지만….
“그나저나 시노부 군은 학생회 일로 바쁘지 않슴까? 오늘 연습 괜찮은 건가여?”
“아침에 학생회 일을 대부분 끝내고 와서 오후는 한가하다오! 테토라 군이야말로 요즘 바쁘지 않소?”
“저도 동아리 활동을 아침에 끝내고 와서 오늘 오후는 괜찮슴다. 리더 모임은 이번 주에 없구여.”
1학년 때는 잘 느끼지 못했지만 직접 겪어보니 선배들이 참 대단하게 느껴짐다. 테토라의 진솔한 이야기에 시노부가 끄덕끄덕. 미도리와는 달리 학생회 서기와 유닛 리더 또 부 활동의 부장으로서 일하는 두 사람은 아무래도 많이 바쁜 듯했다. 둘만의 세계에 어울리지 못한 미도리가 멍하니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는 사이,
“야호!”
“아악!”
갑자기 뒤에서 덮치듯 누르는 무게에 미도리가 까무러치듯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덕분에 뒤에 매달려있던 무언가는 떨어졌지만, 교실에 있던 모두의 관심을 독차지해 버렸다.
“너무해-, 미도리 군!”
“히나타 군? 어쩐 일임까?”
“히, 히나타 군…?”
미도리의 큰 소리를 듣고 테토라와 시노부가 돌아본다. 때마침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하고도 얄미운 목소리에 미도리가 고개를 돌려 상대방의 정체를 확인했다. 얼마나 깜짝 놀랐던지 범인인, 히나타의 얼굴을 보고서도 벌렁벌렁 뛰는 심장이 아프다.
“테츠 군이랑 시노부 군! 안녕!”
되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히나타를 원망스레 쳐다보는 미도리의 어깨를 토닥여주는 그에게 테토라와 시노부가 다가온다.
“히나타 군도 안녕하시오!”
“오랜만에 봤다기엔 며칠 전에 봤잖슴까.”
“그런 거에 집착하면 인기 없어, 테츠 군! 아무튼 시노부 군은 오늘도 귀엽네-!”
테토라의 반박에 새초롬한 눈빛으로 답한 히나타가 고개를 돌려 시노부를 쳐다보며 싱긋 웃는다.
“그, 그게 인기랑 무슨 상관임까?! 잘 모르겠다구여! 그나저나… 미도리 군, 괜찮은 검까?”
“으… 깜짝 놀랐어….”
그래도 정체를 확인하니 조금 마음이 풀리는 건지 안도의 한숨을 푹 쉬는 미도리를 테토라가 안쓰럽다는 듯 쳐다본다. 저도 많이 당해봐서 암다. 눈빛으로 말하는 테토라를 보며 미도리도 고개를 끄덕인다.
“으…. 귀엽다는 말보다는 든든해 보인다는 말이 더 좋은데 말이오….”
“하지만 시노부 군, 귀여운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그, 그렇소이까?”
“그럼! 테츠 군을 봐봐. 쉽게 귀엽다고는 할 수 없는 얼굴이잖아.”
“네? 갑자기 저여?!”
뜬금없는 히나타의 저격에 깜짝 놀란 듯 테토라의 눈이 동그래진다. 키득키득, 테토라의 반응이 마음에 드는지 히나타의 얼굴에 해맑은 웃음이 가득하다.
“아무튼… 히나타 군, A반에는 왜 온 거야….”
“아!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했다! 미도리 군 땡큐!”
이거, 테츠 군한테 전해주러 왔어. 히나타가 들고 있던 검은색 펜을 테토라에게 건넨다. 그냥 평범한 검은 펜 같은데….
"펜이오?"
"응응, 전에 리더 모임에서 빌렸거든."
“아, 감삼다…! 나중에 받아도 괜찮았는데 말이져.”
“얼굴도 볼 겸 겸사겸사-.”
저번 주 리더모임에서 빌린 테토라의 펜을 전해주러 굳이 A반까지 찾아왔다는 히나타가 찡긋- 완벽한 아이돌의 윙크를 보여준다. 아이돌이라면 이 정도 윙크는 해야 한다는 느낌으로. 뭐, 미도리가 그런 윙크를 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감사함다.”
펜을 돌려받은 테토라가 싱긋 웃으면서 인사한다. 히나타가 교실에 온 이후로 테토라의 표정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 보이는 건 미도리의 착각일까. 그리고 계속 히나타 군이랑만 눈을 마주치는 것 같기도 한데…. 착각이겠지…. 테토라의 시선을 따라 쳐다본 히나타의 얼굴에는 왜인지 모르게 장난기가 가득하다. 왠지 불길한 느낌….
“그럼 음료수 사다 줘, 테츠 군!”
“네?”
“테츠 군을 위해 멀리 있는 길을 돌아 A반까지 왔더니 목이 마른 것 같아. 테츠 군 펜을 돌려주러 온 거니까 매점에서 음료수 사다 줄 거지?”
멀리 있는 길을 돌아오기는, 바로 옆이 B반 아니었나. 히나타의 말도 안 되는 말에 미도리가 테토라를 쳐다본다.
“수업 시작까지 얼마 안 남은 것 같은데여?!”
“열심히 길러 놓은 체력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게 아니겠어? 자 테츠 군, 출발-!”
뒷문을 가리키며 활기차게 출발을 외친 히나타를 보며 당황한 듯 짧게 허둥지둥하던 테토라가 결국 후다닥 매점을 향해 달려간다.
“앗! 테토라 군, 정말 가버렸소!”
“HR 시간까지 5분 남은 것 같은데….”
“테츠 군 힘내-!”
키득키득 웃으면서도 히나타의 시선은 매점으로 급하게 달려가는 테토라를 따라간다. 분명 테토라의 말대로 나중에 돌려줘도 됐을 텐데 굳이 아침부터 찾아온 히나타도, 또 그런 히나타에게 휘말려 급하게 교실을 뛰쳐나간 테토라도 이해할 수 없는 미도리였다.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히나타 군, 내 책상에서 일어나줬으면 좋겠네…. 도대체 왜 내 책상 위에 자연스럽게 앉는 거야…?
☆
자기 교실인 것처럼 들어오는 친구들에게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히나타가 참 자연스러워 보인다. 엉덩이가 아프지도 않은 건지 아니면 미도리의 책상이 마음에 들었던 건지, 책상에서 일어나지 않는 바람에 책상 주인인 미도리도 같이 다른 친구들의 시선을 받아야 하는 게 괴로웠다. 수업 준비를 해야겠다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시노부가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미도리가 애써 자기 쪽으로 몰리는 시선을 못 본 척하는 사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사람이 드디어 교실로 돌아왔다.
“테츠 군, 왔네!”
히나타가 자주 마시던 음료수병을 든 테토라가 헐떡거리며 교실로 돌아온 건 종 치기 딱 1분 전인 아슬아슬한 시각이었다.
“와, 왔슴다!”
“테토라 군, 고생했어….”
다행히 복도에서 뛰다가 하스미 선배나 쿠누기 선생님께 걸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마 걸렸다면 HR 시간 안에 들어오기는커녕 교무실로 끌려가 잔소리 폭탄과 반성문을 쓰고 있었겠지.
언제 미도리의 책상에서 일어나려나 싶었던 히나타가 가벼운 몸짓으로 일어나 테토라가 건네는 음료를 받았다.
“와 고마워, 테츠 군-! 답례로 츄- 해줄까?”
“돼, 됐슴다! 그런 장난치지 마세여!”
히나타의 장난 가득한 말에 테토라가 진심으로 당황한 듯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1학년 때도 느꼈지만 테토라는 히나타에게 꽤 약한 듯싶었다. 뭐, 생각해보면 과연 같은 학년 친구 중 히나타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도 테토라가 평소 보여주는 행동이나 마음가짐이 마냥 놀리기 쉬운 가벼움이 아니었기에 히나타의 장난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테토라의 모습이 웃기면서도 낯선 게 사실이었다.
“왜애-. 사실 테츠 군 기대하고 있는 거 아니야?”
“그런 거 아님다!”
테토라의 팔을 콕콕 건드리면서 키득키득 웃던 히나타가 교실을 가득 울리는 종소리에 음료가 들은 병을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아무튼, 음료수 잘 마실게! 뽀뽀 대신 오늘 학교 끝나고 내가 맛있는 거 사줄 테니까-! 문자 해, 테츠 군!”
미도리와 시노부, 다른 친구들에게도 손을 짧게 흔들어 인사한 히나타가 자신의 교실로 돌아간다. 히나타의 뒷모습을 보던 테토라도 서둘러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히나타가 앉아있던 책상에 드디어 물건을 올려놓을 수 있게 된 미도리가 가방에서 귀여운 캐릭터 모양의 필통을 꺼낸다. 고개를 들다 우연히 본 대각선 자리 주인의 귀가 살짝 붉었다는 건 굳이 생각하지 않기로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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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동아리 활동이 끝나고 바로 집으로 갈 수 있었는데…. 하필 지갑을 책상 밑에 두고 오다니. 누가 뒤지지만 않는다면, 굳이 가지러 가지 않아도 되는 게 아닐까 싶어 조금 망설였지만, 만약 지금 챙기지 않아 지갑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하니 꽤 곤란해졌다. 지갑 안에 한정판 마스코트 캐릭터 카드가 들어있단 말이야. 그 카드 가지고 싶어서 얼마나 발을 동동 굴렀는데, 지갑을 잃어버린다니 정말 말도 안 된다.
터덜터덜, 지친 발걸음을 이끌고 돌아온 교실. 모두가 떠나고 빈 교실에 혼자 들어가려니 기분이 더 우울해진다. 나도 바로 집에 갈 수 있었는데….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한 꼴이잖아… 우울해…. 빈 교실 때문일까, 미도리의 느릿한 발걸음 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린다.
의자를 살짝 빼고 책상 밑에 손을 넣어보니 다행히도 넣어놓은 그 자리에 얌전히 있는 지갑이 잡힌다. 혹시나 해 지갑을 안을 확인해봤지만 얼마 되지 않는 현금과 카드, 그리고 마스코트 캐릭터 카드까지 무사히 들어있었다.
“다행이다….”
지갑을 가방에 잘 집어넣은 미도리가 안도의 한숨을 쉰다. 으…. 이제 빨리 집에 돌아가서 귀여운 인형들이 잔뜩 있는 침대로 들어가면 완벽할 거야…. 서둘러 돌아가려는 미도리의 시야에 우연히 창 너머로 두 인영이 눈에 띄었다. 낯익은 모습의 두 사람.
“아, 테토라 군이랑 히나타 군이다….”
학교 안 커다란 벚나무의 아래를 지나가는 두 사람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하다. 놀리고 놀림당하고, 티격태격하는 듯하지만, 꽤 친하게 지내지, 두 사람. 집에 갈 거면 같이 가자고 해볼까…. 미도리가 두 사람에게 아는 척을 하려 창가로 다가가자 그사이 약한 산들바람이 불었는지 예쁘게 피어있는 벚나무가 흔들리며 분홍색의 꽃잎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나둘 떨어지는 벚꽃잎이 마치 로맨스 영화 속의 한 장면 같다. 글쎄, 저 아래 있는 게 테토라와 히나타이니 장르가 가슴 떨리는 로맨스가 되지는 않겠지만.
예쁜 곡선을 그리며 떨어지던 벚꽃 잎 하나가 히나타의 머리 위에 자리 잡는다. 눈치채지 못한 건지 계속해서 조잘조잘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히나타와 머뭇거리다 손을 뻗어 꽃잎을 떼어주는 테토라. 그 짧은 찰나 속 두 사람의 표정을 정확하게 볼 수는 없었지만, 미도리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저 두 사람과 같이 하교하겠다고 아는 척을 하는 순간 미도리의 행복해야 할 하굣길은 지옥 같은 가시밭길이 될 것이라고. 아… 절대 아는 척하지 말아야지. 재빨리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뗀 미도리가 빠른 걸음으로 교실을 빠져나간다. 굳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 알아야 할까. 미도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편안한 삶은 모름에서 오는 법. 아는 것이 없어야 신경 쓸 일이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앞으로도 모르는 채로 있는 게 제일 좋지 않을까. 가방끈을 꼭 잡은 손. 교실에 들어올 때와는 다르게 빠른 발걸음이 미도리의 마음을 잘 보여주는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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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학기가 시작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익숙해진 교실과 유성대 연습실 그리고 선배라는 호칭까지. 유성대 리더의 상징인 붉은 옷을 입은 테토라가 유성대를 이끄는 것도, 작년에는 그저 귀엽다고만 생각했던 시노부가 든든한 학생회 서기라는 것도 이제는 자연스러운 일과처럼 지나간다.
그 순간에는 힘들고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지나고 보면 언제 이렇게 빠르게 흘러갔나 싶은 게 시간이려나. 공부와 부 활동, 연습 그리고 유성대 활동까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착실하게 보낸 한 달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오랜만에 부 활동도 유성대 연습도 없는 평온한 날! 모리사와 선배를 따라 쉬는 날만큼은 착실하게 쉬게 해주려는 테토라에게 감사했다.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처럼 바쁘게 움직이는 손으로 신을 갈아 신는 도중,
“야호-! 미도리 군!”
“으악-!”
데자뷔인가. 전에 분명 비슷한 일을 겪었던 것 같은데. 신발장에 실내화를 집어넣던 미도리의 등을 탁 때리는 손길과 익숙한 목소리.
“히나타 군! 그러다 넘어지면 다친다구여!”
뒤따라 들리는 또 다른 익숙한 목소리에 미도리가 자포자기한 얼굴로 뒤돈다.
“히나타 군이랑 테토라 군….”
오랜만에 보는 히나타와 교실에서 나오기 전까지 함께 있던 테토라였다. 미도리가 먼저 발견했다면 분명 피했을 조합이기도 하지.
“멋진 히나타 군이랑 그냥 테츠 군이지!”
“그냥은 뭠까?! 왜 히나타 군 혼자 멋진 건데여?!”
저도 멋진 남자이고 싶슴다! 히나타의 말이 분한 듯 눈썹을 한껏 치켜세워 히나타를 쳐다보는 테토라의 모습이 왠지 바보 같다. 미도리가 상상했던 평온한 방과 후의 느낌과는 정반대의 두 사람의 조합이라니. 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할 것 같은 느낌에 초조해진다.
“그야 테츠 군보다 내가 더 멋진 걸-. 그나저나 미도리 군은 지금 집에 가는 거야?”
“응….”
미도리가 최대한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마음을 가득 담아 답했다. 그런 미도리의 마음을 히나타와 테토라가 알아줬으면 좋았을 텐데.
“우리 상가에 새로 생긴 카페 갈 건데 미도리 군도 같이 가자!”
“나, 나도?”
“좋네여! 미도리 군도 괜찮으면 같이 가여.”
“지금 30% 할인하는 이벤트 중이야!”
집 근처에서 받았다며 곱게 접힌 분홍빛의 전단지를 주머니에서 꺼내 보여주는 히나타의 눈빛이 반짝인다.
“아니…. 원래 둘이 가려고 했던 건데 내가 끼어드는 건 좀….”
“뭐 어때! 여럿이 가면 더 즐겁잖아.”
“맞슴다!”
“그게… 나는,”
“지금 그 카페 한정 디저트 먹으면 캐릭터 열쇠고리 준다고 하던데. 같이 갈 거지?”
전단지 구석을 가리키는 히나타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보이는 하찮고 귀여운 카페 마스코트 캐릭터가 미도리에게 인사했다. 귀여워…! 앞치마를 메고 있는 곰이었다. 곰이랑 카페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깔끔하지 못한 선으로 삐뚤삐뚤 그려진 폭신폭신할 것 같은 그림체가 최고야…! 어떻게 이런 그림으로 카페 광고를 하려고 했을까. 멍청한 곰의 눈매가 너무나도 짜릿하다. 가지고 싶어…!
“갈래!”
양손으로 히나타가 들고 있던 전단지를 건네받은 미도리가 두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그런 미도리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히나타와 테토라.
“좋슴다! 오랜만에 셋이 같이 노는 거네여!”
“맛있는 것도 먹고 할인도 받고-! 카페 다녀온 다음에 게임방도 가자!”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마스코트 캐릭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미도리는 두 사람의 뒤를 졸졸 따라가기 바빴다. 아마 지금 향하는 곳이 어떤 곳인지 알았다면 가지 않았을 텐데….
☆
“이, 이런 카페라고는 들은 적이 없슴다…!”
“음-. 전단지가 많이 분홍색이기는 했었지…?”
“으…. 그냥 돌아가고 싶어…….”
직원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은 세 사람. 눈만 데구루루 굴려 가며 분홍빛의 카페 내부를 구경한다. 천장도 분홍색, 바닥도 또 벽도 분홍색. 카페의 소품까지도 모두 분홍색으로 채워진 이 카페의 한 가운데 자리한 테이블에 앉은 세 명의 남고생들은 서로 시선을 마주치며 어색한 웃음만 흘린다. 테토라, 히나타와 미도리가 앉은 테이블을 뺀 나머지 손님들은 모두 알콩달콩한 커플로 보였으니까. 아마 이곳… 그런 사람들을 위한 곳인 것 같기도…. 이런 카페는 아무리 봐도 친구들끼리 편하게 들어오기에는 거리가 있어 보였으니까. 적어도 미도리에게는 말이다.
“그래도 이왕 온 김에 맛있게 먹고, 할인도 받고 또 열쇠고리도 받아 가면 좋지!”
한껏 풀죽은 미도리를 보며 히나타가 킥킥 웃는다. 미도리를 놀리려고 일부러 데리고 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금방 회복하는 히나타가 신기하다. 진짜 일부로 데리고 온 거 아니야…? 이런 장소가 어색해 보이는 건 테토라도 마찬가지라 미도리를 골리려고 데리고 온 건 아닌 것 같았지만…. 히나타 군이라면 당연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지…. 분홍색 프릴이 잔뜩 달린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미도리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다가와 작은 메뉴판을 건네준다.
“다들 뭐 드실 검까?”
“미도리 군은 당연히 한정 메뉴 먹을 거지?”
“응… 난 열쇠고리만 받으면 되는데….”
이제는 분홍색이 아니면 이상할 것만 같은 느낌의 메뉴판을 열기도 어려워 머뭇거리던 미도리가 말했다. 메뉴판 표지에 미도리가 첫눈에 반한 마스코트 캐릭터의 얼굴이 크게 그려져 있어 굳이 넘기지 않으려는 마음도 조금 있었지만. 왠지는 모르겠지만 흘끔흘끔 이쪽 테이블을 쳐다보는 시선들이 불편하다. 두 사람은 신경 쓰이지도 않는지 메뉴판에 시선 고정이었지만.
“테츠 군은?”
“전… 배를 채울 수 있을 만한 게 좋겠슴다.”
“여기, 마스코트 캐릭터 모양의 버거 어때?”
“버거 좋슴다! 히나타 군은 뭐 먹을지 정했슴까?”
“나는 러브러브 허니 시나몬 롤이랑 푸링푸링 고급 커피 젤리랑 슈파루파 크림 가득 크루아상이랑 차갑지만 달콤해 아이스크림 잔뜩 슈, 또 반짝반짝 레인보우 슈가 조각 케이크!”
거의 한 페이지에 해당하는 양의 알 수 없는 이름이 쉴 틈 없이 히나타의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마법 소년의 변신 마법을 본 것처럼 멍하기만 하다.
“….”
“그걸 다 먹겠다구여?!”
“이왕 온 거 많이 먹어보고 싶달까! 나는 달콤한 걸 정말 좋아하니까!”
번쩍 손을 들고 다가온 종업원에게 다시 한번 메뉴를 말해주는 히나타의 모습이 대단하다. 듣기만 해도 벌써 머리가 지끈 아파지는 것 같아…. 미도리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진다. 괜히 따라온다고 했던 걸까. 하찮지만 귀여운 마스코트 캐릭터만 아니었어도 이런 분홍색이 잔뜩 칠해진 카페에 앉아있을 일은 없었을 텐데….
“그런데 다들 커플인가 봐-.”
그걸 인제야 눈치를 챘는지 히나타가 테토라와 미도리를 향해 쭉 몸을 내밀어 테이블에 기대고는 소곤소곤 말을 건넨다. 이런 쪽에는 눈치도 없는 건지 움찔 놀라는 테토라도 똑같았다.
“그, 그러고 보니 그렇네여….”
살짝 몸을 뒤로 빼며 시선을 둘 곳을 찾는 테토라는 주변의 커플이 문제가 아닌 걸까. 있지, 나 괜히 온 것 같아…. 아니 괜히 왔다…. 집에 가고 싶어…. 다시 한번 후회가 밀려들어 착잡해진 미도리가 시선을 바닥으로 떨군다. 왠지 모르게 이 두 사람 사이에 끼이면 체력이 탈탈 털리는 기분이 들었다. 아, 정정하자. 체력과 정신력 모두 털리는 기분….
“미도리 군은 이상형이 어때?”
“… 나?”
“응! 미도리 군 잘생겼으니까 인기도 많을 것 같은데. 이상형은 들어본 적이 없네.”
“으… 딱히. 이상형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냥, 마음이 안정되는 사람… 이면 좋겠어.”
갑작스레 물어보는 히나타의 질문에 미도리가 우물쭈물하며 대답한다.
“미도리 군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그럼 테츠 군은?”
진짜 미도리의 답을 예상했던 건지 아니면 그냥 던져본 말이었는지. 매번 그랬지만 히나타가 하는 말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타겟을 미도리에서 테토라로 바꿨는지 방긋방긋 웃으며 질문을 던지는 히나타의 목소리가 짓궂다.
“저, 저는… 잘 통하는 사람일까여…. 그러는 히나타 군은여?!”
“글쎄? 음… 나는 같이 있을 때 즐거운 사람일까나-. 다들 이상형이 구체적이지는 않네.”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슴다….”
“나도….”
분홍색 범벅인 카페에 안. 커플들에게 둘러싸여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다니. 마스코트 캐릭터고 뭐고 집으로 달려가고 싶어진다. 차라리 집에 바로 갔었다면 마스코트 캐릭터 열쇠고리는 못 받았겠지만 편안한 마음과 안전한 침대 속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었을 텐데…!
“그래도 다들 파릇파릇한 고등학생이잖아! 누군가랑 사귀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딱히….”
“저도 없슴다. 남자 중의 남자가 되기 위해 수련하는 것도 바쁨다.”
“에-. 재미없네.”
테토라와 미도리의 특별한 대답을 기대했던 걸까. 미적지근한 두 사람의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던지 테이블에 기대고 있던 히나타가 뿌- 입술을 내밀고 등받이에 몸을 기댄다.
“히나타 군은 있는검까?”
“음-. 비밀이야.”
“그, 그런 게 어딨슴까! 히나타 군은 다 물어봤으면서여….”
“어라, 테츠 군은 내가 누구를 마음에 들어 하는지 궁금한 걸까-? 혹시 질투?”
“그… 그,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 궁금하다고 했으면 알려주려고 했는데! 아쉽네!”
“으… 그만 놀리십셔, 히나타 군!”
저 두 사람…. 뭐하는 걸까. 나 그냥 집에 가도 되는 걸까. 주문한 메뉴, 얼른 나왔으면 좋겠다…. 아니, 이제는 그냥 열쇠고리만 받아서 집에 가고 싶어…. 우울해…. 제 옆자리에 앉은 테토라와 건너편에 앉은 히나타가 별것도 아닌 거로 투닥거림을 하는 게 왜 이렇게 꼴 보기 싫은 건지 모르겠다. 이런 미도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도리와 잠깐 시선을 마주친 히나타가 잔망스러운 윙크를 보낸다. 됐고… 그냥 집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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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란히 걷고 있는 테토라가 일회용 접시를 들고 교실로 돌아가는 미도리의 기분을 살핀다. 테토라가 미도리의 눈치를 보는 상황이라니. 정말 흔치 않은 일이었다. 뭐,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기는 했지만. 하… 착잡하다.
“저… 미도리 군, 화난 검까…?”
“으… 화났다기보다는….”
당황스럽달까. 테토라가 무슨 요리를 하든 간에 무조건 태워 먹는 건 알고 있었지만, 조리실습 짝으로써, 바로 옆에서, 미도리가 나름 열심히 만들었던 요리가 새까맣게 타버린 모습을 봐버리고 말았는걸. 1년 동안 그런 모습을 가끔, 아니 솔직히 자주 봤지만…. 센 불에 익히면 안 된다고 여러 번 강조했던 미도리의 말은 어디로 들은 건지 미도리가 잠깐 한눈파는 사이에 맛있게 익어가던 야키소바를 홀라당 태워 먹고 말았다. 테토라 군의 집착 아닌 집착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미도리를 보며 테토라가 민망한 듯 볼을 긁적인다.
“조금 더 익혀보려고 했던 건데 말임다….”
맛있는 점심이 될 수 있었던 야키소바는 쾌쾌한 탄내를 풍기는 차마 입에 대지 못할 무언가로 변해있었다. 일단 접시에 담아서 교실로 돌아가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버려야겠지….?
“점심… 사 먹어야겠네….”
“그러게여….”
창피함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테토라가 답한다. 다른 애들은 조리실습 때 만든 야키소바로 점심을 먹고 있겠지…. 아… 생각만 해도 우울하다. 조리실에서 교실까지 왔는데 또 매점을 다녀와야 한다니…. 왜 사람은 텔레포트를 하는 기술이 없는 걸까. 너무 무능력하지 않아…? 숨만 쉬어도 모든 것이 해결되는 그런 능력이 있으면 좋겠어…. 휴, 한숨을 쉬는 미도리의 어깨가 축 처진다.
“욥! 미도리- 군! 그렇게 몸을 구부려도 작아 보이지는 않는다고-!”
갑자기 미도리의 뒤에서 들려오는 악의는 없지만 아주 직설적인 말에 움찔 몸을 떨었다.
“으….”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았는데…! 손에서 온기를 전하고는 있지만 먹을 수는 없는 음식만으로도 마음이 아팠는데 발랄한 말투가 미도리의 가슴을 후벼판다. 우울해…. 미도리가 울상이 된 얼굴로 뒤를 돌아본다.
“히, 히나타 군?”
“응?”
“왜 다 젖은 검까!?”
전 시간이 체육이었는지 체육복을 입은 히나타의 머리와 상의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하얀색 티가 젖어 살빛이 비쳐 보이는 게 꽤 찝찝해 보인다.
“아-. 더워서 세수하는 중에 다른 애들이랑 물싸움 해버려서!”
그래도 재밌었어! 방긋 웃으며 뚝뚝 물이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헝클인 히나타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테토라와 미도리에게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온다. 으… 히나타가 다가올수록 같이 척척해진 느낌이 들어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다, 다 보인다구여!”
테토라는 그런 게 아니었나 보다. 히나타의 살이 보이는 게 어떻다고 저렇게 과민반응하는 건지. 모르겠다. 응… 진짜 모르겠네….
“응? 뭐가 보이는데-?”
분명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게 분명하다. 얼굴에는 짓궂은 웃음을 가득 담고 말끝을 늘리는 히나타의 목소리를 들으면 누구라도 알 수 있을걸.
“그… 그게…!”
아…. 미도리가 할 말을 잃은 것처럼 테토라를 쳐다본다. 테토라 군, 바보야…? 유성대의 든든한 리더인 유성 레드가 이런 바보라니. 어린이 여러분들이 뭘 믿고 우리를 히어로라 부를 수 있겠어. 아니 어린이 여러분들이 놀라기 전에 유성 그린이 먼저 도망가고 싶다고 꼭 말해주고 싶었다. 어쩌다 보니 얽히고 싶지 않은 상황에 또 걸려버린 것만 같아 다시 우울해진다. 테토라 군, 얼굴은 왜 붉어지는데…? 테토라와 히나타를 쳐다보던 미도리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시선을 떨군다.
“테츠 군, 왜 말을 하다 말아-.”
키득키득 웃으며 시선을 피하는 테토라를 굳이 따라가 놀리는 히나타도 대단하다.
“수건은 없는 검까? 그, 그러다가 감기 걸린다구여!”
“안 그래도 유우타 군이 빨래만 늘렸다고 잔소리 폭탄을 던지면서 수건 가져다준다고 했는데 기다리기 싫어서 들어와 버렸달까-?”
운 좋게 테츠 군이랑 미도리 군을 만났으니 럭키! 상큼하고 발랄한 말투로 말하는 히나타와는 달리 미도리는 그냥 우울하기만 하다. 점심시간 끝나기 전에 매점이나 카페테리아 가야 하는데….
“그나저나, 미도리 군 손에 든 건 뭐야?”
“아…. 조리실습 시간에 만든 야키소바임다….”
그제야 미도리의 손에 들린 일회용 접시를 보며 물어보는 히나타에게 테토라가 머쓱한 듯 우물쭈물 대답한다. 접시 위에 담긴 야키소바로 추정되는 무언가를 뚫어지라 쳐다보던 히나타가 풉, 웃음을 터트린다. 듣기 좋은 히나타의 웃음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근처를 지나가는 다른 학생들의 시선이 쏠리는 것도 모르고 테토라의 팔을 잡고 배꼽이 빠질 듯 웃던 히나타가 눈가에 찔끔 고인 눈물을 닦으며 미도리를 쳐다본다.
“미도리 군, 고생이 많네-!”
여전히 웃음이 가득 담긴 목소리. 반쯤 진심이 담겼겠지만, 또 놀림도 담겨있겠지. 작년, 1년 동안 테토라와 조리실습 짝꿍을 했던 히나타만이 할 수 있는 말이려나. 미도리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테토라 덕분에 미도리도 일 년간 고생할 예정이기 때문에 딱히 히나타의 말을 부정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엑, 미도리 군?!”
믿었던 도끼에 배신당한 표정으로 미도리를 쳐다보는 테토라의 시선을 피해 본다. 하지만… 사실인 걸…. 이쯤 됐으면 테토라 군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 와중에도 팔을 잡은 히나타가 신경 쓰이는지 딱딱하게 굳어있는 테토라의 모습이 정말로 바보 같다. 근데 있지, 나 이제 가도 될까…?
“형? 밖에서 기다리라니까 왜 여기서 놀고 있는 거야?!”
들어올 거면 교실로 들어오던지! 미도리의 마음을 알아준 것인지 B반 교실에서 나오던 유우타가 금방 히나타를 발견하고는 세 사람에게 다가온다.
“유우타 군-! 형아를 위해서 수건을 챙겨주다니…! 감동이야!”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 건 형이었잖아.”
히나타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수건을 건넨 유우타가 눈짓으로 미도리와 테토라에게 인사했다. 미도리도 유우타를 따라 고개를 끄덕인다.
“안녕하심까, 유우타 군!”
“응. 두 사람, 복도에서 접시 들고… 뭐 하는 중인데?”
미도리가 들고 있는 접시 위 무언가를 보고 소리 없는 탄식을 보인 유우타가 물었다. 이해할 수 있어, 그 마음…. 아니 충분히 이해해….
“조리실습 끝나고 교실로 돌아가는 중이었슴다.”
“응…. 매점 가려고….”
“아, 그러네여!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에 빨리 다녀와야겠슴다!”
“나도 매점 가려고 했는데! 같이 가자-.”
유우타에게 건네받은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던 히나타가 테토라와 미도리의 말에 번쩍번쩍 뛰어오른다. 열심히 닦지 않은 건지 아니면 수건 한 장으로는 무리였던 건지 체육복은 여전히 축축해 보인다. 덜 마른 주황색의 머리카락에도 물기가 남아있었다. 개운하게 마르지 않은 옷이 찝찝하지도 않을까, 괜히 궁금해진다. 뭐, 물어보지는 않을 거지만.
“형은 옷이나 먼저 갈아입어. 그러다 감기 걸려도 난 모른다-.”
“앗, 유우타 군- 매정해!”
“맞슴다! 히나타 군, 옷 먼저 갈아입으십셔! 필요한 게 있으면 제가 사다 드리겠슴다!”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하고 허공을 쳐다보는 테토라의 목소리가 짐짓 엄하다. 두 쌍둥이는 하나도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렇게 더 바보 같아 보이기도 하는걸….
“테츠 군이 그렇게 나를 위해 맛있는 걸 사다주고 싶다니. 말리지는 않을게-.”
“빨리 들어가서 옷이나 갈아입어, 형.”
“유우타 군, 혹시 내가 테츠 군한테 관심을 보여서 질투하는 거야? 걱정하지 마! 형은 유우타 군밖에 없는걸-!”
히나타의 쓸데없는 말에 반응할 필요도 없다는 듯 무시해버린 유우타가 미도리와 테토라에게 인사한다.
“우린 이제 들어갈게. 매점에서 형이 말하는 건 사 올 필요 없어. 도시락 있거든.”
“응….”
유우타의 단호한 말에 미도리가 열심히 대답한다. 이제 우리도 가야 하니까. 더 미적거리다가는 아무것도 못 먹고 점심시간이 끝나버릴 것 같았다.
“너무해- 유우타 군!”
“잘 가….”
“두 사람 다 점심 맛있게 드십셔…!”
예외 없이 교실로 들어가 버리는 유우타와 그런 동생에게 칭얼거리는 히나타, 그리고 그런 히나타를 아쉽다는 듯 쳐다보는 테토라라니. 테토라의 교복 셔츠에 히나타의 손자국처럼 물 자국이 남아있었다. 아직도 살짝 붉어져 있는 테토라의 귀가 보인다. 아, 진심으로 학교에서 도망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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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수요일 점심시간이었다. 여름의 초입이라 점점 더워지고 있다는 것만 빼면 괜찮은 날. 시간이 참 빨리 가는 것 같았다. 언제 오나 싶었던 방과 후 활동이 없어 바로 집에 갈 수 있는 귀중한 날이 벌써 오늘이었으니까! 저번처럼 누군가가 같이 어디를 가자고 해도 매정하게 거절할 생각이었다. 오늘은 꼭, 바로 집에 갈 거야…! 한 달 전의 그때를 생각하니 확 올라오는 괴로움에 미도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미도리 군? 괜찮은 것이오?”
“아… 응. 괜찮아….”
생각만 해도 마음이 힘들어지는 그 카페의 기억은 이제 머릿속에서 지워버려야지…. 그리고 오늘은 꼭, 바로 집으로 가고 말겠어…! 매점에 다녀온다며 잠시 교실을 비운 테토라를 빼고 시노부와 모여 앉아 도시락통을 여는 그 순간까지도 미도리의 다짐은 굳건했다.
“요! 시노부 군이랑 미도리 군. 도시락 맛있어 보이네!”
다른 반이 된 후로 자주 볼 수 없는 히나타였지만 왜 만날 때마다 미도리를 놀라게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미도리를 놀라게 하지 않으면 인사한 기분이 나지 않는 걸까? 오늘도 잊지 않고 멍청히 있는 미도리 군을 놀래줬어-라며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할 것도 아닐 텐데…! 이번에도 미도리의 뒤에서 불쑥 나온 손과 목소리. 악 소리도 못 질러보고 놀란 미도리의 표정이 무척이나 우울해 보인다.
“히나타 군이구려!”
“응, 정답! 히나타 군입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소이다!”
“으…. 무슨 일로 왔는데….”
“엣- 미도리 군 너무해! 이런 미적지근한 반응! 다른 반이 되어버렸다고 나를 향한 마음이 식어버린 거야?! 우리 좋았잖아….”
저번 달에도 커플들이 잔뜩 있는 그런 곳에 가서 좋은 시간을 보냈잖아…! 실감 나는 히나타의 감정 연기에 움찔 놀란 시노부가 동그란 눈을 깜빡깜빡,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쳐다본다.
“그, 그런 거 아니야! 히나타 군 그런 장난 그만해…!”
미도리의 격한 반응에 배를 잡고 깔깔 웃던 히나타가 흘리지도 않았던 눈물을 닦는 척한다. 짓궂다.
“아-. 재밌었다! 있지, 이거 테츠 군한테 전해줘.”
“테토라 군 매점 다녀온다고 나간 지 꽤 되어서 금방 올 것인데 기다렸다 주고 가지 않으시겠소이까? 점심도 같이 먹으면 좋을 것 같소이다!”
“아, 요즘 내가 좀 바빠서…. 요즘 트윙크가 엄청 잘 나가잖아! 밥 먹을 시간도 없다니까! 아무튼, 부탁 좀 할게! 고마워!”
대답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전부 쏟아낸 히나타가 들고 있던 것을 미도리에게 떠넘기듯 건네주고는 후다닥 자리를 떴다. 억지로 뭔가를 건네받은 손이 꺼림칙하다.
“순식간에 가버렸소이다….”
“그러게….”
히나타에게 얼떨결에 건네받은 것으로 시선을 돌린 미도리가 한숨을 푹 쉬었다. 놀이공원 티켓 두 장이라니…. 무슨 뜻이 담긴 건지, 어째서 테토라에게 건네 달라고 하는 건지 이유조차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올해 들어서 더더욱 두 사람의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졌단 말이야…. 확신은 없었지만, 미도리의 마음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분명 귀찮고 머리 아픈 일이 될 것이라고.
“안 그래도 요즘 트윙크가 엄청 바쁘다고 유우타 군에게 들었는데, 밥 먹을 시간도 없다니…. 식사는 꼭 챙겨야 하는데 걱정이오.”
안타까운 눈빛으로 히나타가 나간 뒷문을 쳐다보는 시노부와 달리 미도리는 불길함을 알리는 직감에 안절부절못하는 중이었다. 요즘 트윙크가 이곳저곳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히나타가 도망치듯 달려나갔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미도리에게 손안에 올려진 놀이공원 티켓은 굉장히 부담스러운 무게로 다가왔다.
“다녀왔슴다!”
히나타가 A반 교실에서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매점에 갔던 테토라가 돌아왔다. 물건을 봉투에 넣어준다는 걸 거절한 모양인지 한 손에는 빵 두 개와 다른 손에는 우유 팩 하나가 들려있었다.
“저… 테토라 군, 이거….”
“뭠까?”
“방금 히나타 군이 전해달라고 잠깐 들렸소이다!”
책상에 들고 있던 빵과 우유를 내려놓는 중, 히나타의 이름이 들리자마자 시선을 미도리의 손으로 옮긴 테토라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진다. 움찔. 그, 그렇게 쳐다보면 무서운데….
“감삼다….”
“아, 아니야….”
다른 말은 없었지만 티켓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테토라가 마음에 걸린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미도리와 시노부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흘끔흘끔 테토라를 쳐다본다. 두 사람의 시선을 눈치챈 것인지 굳은 표정의 테토라가 재빨리 놀이공원 티켓을 뒷주머니에 집어넣고 자리에 앉았다. 금방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바꾸면서.
“요즘 트윙크가 매우 바빠서 직접 전해주지 못한 것 같소이다…!”
테토라의 눈치를 보던 시노부가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그러네여…. 그런데 시노부 군, 다음 주 화요일 오후에 학생회 모임 있다고 하셨져?”
“그렇소이다. 유성대 연습 계획 중이라면, 소인은 따로 연습하는 쪽으로 가도 되니, 편하게 짜주시면 좋겠소!”
“저희가 최대한 시간 맞춰보는 쪽으로 해보겠슴다! 시노부 군, 고생이 많네여.”
“테토라 군도 고생이 많소이다!”
시노부의 따뜻한 말에 기분이 좀 나아진 듯 미소짓는 테토라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려나. 아무래도 평소처럼 이야기를 나누는 테토라의 모습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지만 식욕이 없는 건지 빵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모습이 눈에 밟힌다.
으…. 도망치듯 교실에서 나간 히나타와 티켓을 보는 순간 굳어졌던 테토라의 표정이 떠올라 머리가 아프다. 제발 아무 일이 아니길…. 두 사람 가끔 티격태격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어색한 사이는 아니었잖아…. 도대체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혹시 싸운 걸까…? 둘 다 할 말은 하는 성격이라 그럴 수도. 하지만 서로에게 아픈 말을 하는 두 사람이라니 왠지 상상이 잘되지 않는다.
있지… 미안하지만, 혹시 싸울 거라면 내가 모르게 싸우면 안 될까…? 아직 무슨 일인지도 확실하게 알지 못했지만 벌써 머리가 아파지는 것 같았다. 혹시 운 나쁘게 두 사람 사이에 끼이기라도 한다면…. 으… 우울해…. 앞으로도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있고 싶다. 다른 사람들의 문제 사이에 끼어서 이쪽 저쪽 눈치 보는 삶은 싫어… 상상만 해도 우울하다고….! 도시락을 입으로 먹는 건지 코로 먹는 건지 행복해야 할 점심시간이 마냥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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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평소라면 자고 있어야 할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선 미도리의 한숨이 끊이지 않는다.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왜 당번 활동은 이제 시작인 거지…. 얼마 전 학교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칠석제가 끝나 모두가 긴장을 풀고 있을 시기인데 혼자서 아침 일찍 학교를 가야 한다는 사실이 눈물이 나게 억울했다. 당번은 왜 일찍 등교해야 하는 걸까. 같은 시간에 등교해서 준비하면 안 되는 거야? 하아…. 우울해…. 여름이라고 이른 아침부터 더울 필요는 없는데….
히나타 군이 다녀간 그 날 이후로 나도 모르게 테토라 군의 기분을 살핀다고 하면 너무 불쌍해 보이려나…. 딱히 테토라가 화를 낸다거나 기분이 나쁘다는 티를 낸 적은 없었지만, 가끔 보이는 표정이 괜히 신경 쓰였다. 히나타 군과 싸운 걸까. 조용하고 평화로운 한 해를 원했지, 이렇게 눈치 보고 있는 생활을 원한 게 아닌데.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한숨이 이제는 익숙하다.
“와! 미도리 군이다!”
“으악!”
이제는 놀랍지도 않은 히나타의 깜짝 등장.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실을 향하는 미도리의 뒤에서 어떻게 소리도 내지 않고 다가온 건지 등을 찰싹 때리는 손이 맵다.
“오늘 엄청 일찍 나왔네?”
“으…. 당번이라…. 히나타 군은?”
우울함을 가득 담은 미도리의 목소리와는 달리 활기차기만 한 히나타는 학교에 가는 게 좋은 것인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항상 생각하지만, 히나타는 별나다. 이해할 수 없어….
“어제 있었던 트윙크 야외 공연 보고서 쓰고, 의뢰 들어온 것들 골라서 한 번 추려놓아야 하고…. 오늘도 방과 후에 공연 하나 있어서 마무리 확인도 해야 하고! 우리 요즘 잘 나가잖아-.”
아, 숙제도 안 해서 급하게 해야 해! 어깨를 으쓱. 요즘 자신의 행적을 자랑하고 싶다는 듯 뿌듯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미도리를 쳐다보는 모습이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서. 그래서 미도리도 정말로 아무 생각 없이 뱉어버렸다.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히나타 군….”
“응?”
“테토라 군이랑… 무슨 일 있었어?”
“어…? 아니! 아무 일도 없었는데? 왜?”
“그냥… 전에 티켓 전해달라고 했을 때…. 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망했다. 두 사람의 일에 절대 끼어들고 싶지 않았는데. 가능하다면 시간을 돌려서 히나타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면 히나타와 대화를 할 일도 없을 텐데. 아니, 그럼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갈래…. 아무 일도 없었다는 히나타의 말을 그냥 믿고 싶다. 괜한 말을 했다는 자괴감에 갈팡질팡 갈 곳을 잃은 미도리의 시선이 땅으로 떨어진다. 저벅저벅 운동장을 걷는 소리만이 두 사람의 사이를 채운다.
“요즘 유성대도 바쁘지?”
교실로 들어가면 해야 할 당번 활동이 싫어 느릿했던 미도리 발걸음이 점점 속도를 높여가는 중, 히나타가 아무렇지도 않게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을 깬다.
“응…. ”
“후배들은 어때? 잘 따라와? 트윙크는 후배가 없으니까.”
왠지 기분 이상할 것 같아. 킥킥 웃으며 미도리의 옆구리를 찌르는 히나타의 손길에 움찔 몸을 피한다.
“음…. 다들 의욕이 넘쳐서…. 테토라 군이랑 잘 맞는 것 같아.”
테토라의 이름을 말하면서 슬쩍 쳐다본 히나타는 다른 표정 변화 없이 미도리와 눈을 맞췄다. 진짜 아무 일 없었던 걸까. 두 사람의 일에 끼어들고 싶다는 마음은 절대 없었지만…. 테토라와 히나타의 사이에서 탈탈 정신력을 털리는 것도 싫었지만. 그래도 왜인지 모르게 느껴지는 두 사람의 묘한 긴장감을 무작정 모른 척하기 어려웠다. 두 사람 징그러울 정도로 친하게 지냈잖아. 으, 불편해…. 히나타 군은 다른 반에다가 유닛도 다르고, 또 겹치는 부 활동도 아니고… 요즘 바쁘게 활동하는 바람에 볼 일이 적어 괜찮았지만, 테토라 군은 거의 매일 본단 말이야. 하아… 친구고 뭐고 그냥 다 두고 도망가고 싶다….
“테츠 군, 선배로서 멋있는 모습 보여주고 싶다고 열심이던걸-. 리더 모임에서 볼 때마다 더 잘하고 싶다고 말하니까 말이야.”
이런 면은 모리사와 선배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네-. 왜 굳이 미도리를 쳐다보며 말끝을 올리는 건지. 키득키득 웃는 히나타의 웃음소리가 얄밉다. 미도리의 복잡한 마음과는 달리 웃음을 담은 히나타의 목소리는 평온하기만 하다.
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입만 비죽이던 미도리가 어느새 현관에 도착했다는 걸 깨달았다. 닫혀있는 유리문을 살짝 밀고 안으로 들어가니 느껴지는 바깥 공기보다 시원한 온도에 긴장이 풀린다.
“다 왔다….”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미도리의 속마음에 킥킥 웃음으로 답한 히나타가 가벼운 몸짓으로 실내화로 갈아신는다.
“나 먼저 들어갈게! 빨리 숙제 끝내야 해서-.”
미도리를 향해 짧게 손을 흔든 히나타가 후다닥 신발장을 지나 복도로 사라진다. 으으… 괜히 아는 척해서 더 불편해졌어…. 우울함을 가득 담은 얼굴을 양손으로 쓸어내린 미도리가 천천히 신을 갈아신는다. 당번인 것도 우울한데…. 오늘은 시작부터 되는 일이 없는 것 같다.
☆
오늘은 정말 온종일 되는 게 없는 날일까. 아침부터 히나타를 만나 쓸데없는 말을 한 것부터 시작해, 수학 시간에 준비도 못 한 문제를 풀라고 불려 나가지를 않나, 점심 도시락은 집에 두고 와버렸고, 방과 후는 부 활동으로 채워져 있는 하루라니. 꿈속에서라도 겪고 싶지 않은 끔찍한 하루를 보내고 있는 미도리의 어깨가 더는 구부러지기도 어렵겠다 싶을 정도로 처져 있었다.
그래도 앞으로 두 시간…! 틈만 나면 집에 돌아가기까지의 시간을 신속 정확하게 계산하는 미도리의 모습을 수학 선생님이 보신다면 무슨 생각을 하실까. 하루의 마지막 일과인 부 활동만을 남겨놓은 미도리가 비장한 얼굴로 대각선 자리에 앉은 테토라에게 다가간다. 수업이 끝나 모두가 떠난 교실에는 당번인 미도리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테토라만이 교실에 남아있었다.
“테토라 군… 나 당번이라….”
“아- 미안함다, 미도리 군! 빨리 끝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어서….”
많은 뜻을 내포한 당번이란 말에 화들짝 놀란 테토라가 재빨리 책상 위에 널브러진 종이 뭉치들을 정리한다.
“뭐 하는 중이었는데…?”
미도리 특유의 나른함이 섞인 조심스러운 물음에 테토라가 어색한 웃음으로 답한다. 그게….
“부 활동 일짐다…. 나중에 써야지 하고 미루다 보니까 제출 일은 다가오는데 하나도 안 써서… 급하게 쓰고 있었슴다.”
도서관에 가서 마저 써서 제출 해야겠네여. 볼을 긁적이며 민망하다는 듯 대답하는 모습이 평소와 같다.
“고생이 많네….”
“미도리 군은 집에 가는 검까?”
“난 부 활동….”
미도리의 우울한 목소리에 씩- 미소지은 테토라가 서둘러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도리도 미리 챙겨놓은 가방을 어깨에 메고 테토라와 함께 뒷문으로 향했다. 칠판도 미리 깨끗하게 닦았고, 창문도 확인했고. 마지막으로 문을 잠근 미도리가 드디어 오늘의 당번 일에서 해방되었다. 앞으로 이걸 4일이나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우울함이 밀려오지만….
“이사라 선배도 바쁘겠네여. 학생회장에 부 활동 부장까지.”
“그러게. 나였다면 진작에 자퇴해버렸을 텐데….”
극단적인 미도리의 대답이 이제는 익숙한지 웃어넘기는 테토라가 조금 피곤해 보인다. 아무래도 최근에 있었던 S1 칠석제의 뒷일이라던지 부 활동이라던지 신경 쓸 일이 많았을 테니까. 어느 곳이든지 열심히 맡은 일을 책임지려는 테토라에게 감사했다. 열정이 넘치는 모습에 피곤할 때도 많았지만, 사실은 리더의 자리에서 많은 것을 떠맡고 있는 테토라 덕분에 얻는 게 더 많았으니까.
그런데 말이야….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동료이자 친구인 테토라가 어서 빨리 부 활동 일지를 끝내고 집에 가서 푹 쉬었으면 하는 미도리의 착한 마음을 왜 아무도 몰라주는 걸까. 미도리는 단지 평온한 하루를 원했을 뿐인데.
교실에서 나와 복도에서 두 발자국이나 걸었을까, 2학년 B반 앞에서 두 사람과 마주친, 아니 테토라와 말 그대로 부딪친 동급생의 모습에 미도리가 속으로 악! 비명을 질렀다. 물론 대놓고 소리를 지를 수는 없었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주황 머리에 연둣빛 눈동자, 50%의 확률로 아침에 본 히나타 군이였으니까!
교실에서 나왔으면서 왜 유닛 복을 입고 있는지는 몰라도, 분홍색 겉옷을 입고 있는 쪽은….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미도리가 걱정했던 대로 테토라와 부딪힌 사람은 히나타였다. 왜 하필 히나타 군이 지금 테토라 군과 부딪히는 건데…?! 아니, 나랑 부딪혀 달라는 뜻은 아니지만…. 그게 두 사람 지금 뭔가 껄끄러운 것 같아 보였고…. 그리고 테토라 군도 깜짝 놀란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 손은 히나타 군의 허리를 잡고 있는 거야…?
무슨 이유인지 급하게 교실에서 뛰쳐나온 히나타와 하필 문 앞을 지나가고 있던 테토라가 부딪히고 말았다. 왜 나랑 같이 있는 지금….
미도리가 절망에 빠져있는 사이, 재빠르게 상황 판단을 한 건지 날렵하게 테토라의 팔 안에서 빠져나온 히나타가 어색하게 웃는다.
“다들 안녕! 이제 집에 가는 거야? 나도 가야 하는데!”
항상 의연할 것만 같았던 히나타의 당황한 모습은 거의 처음 보는 것 같아 낯설면서 신기하다. 이런 감상평을 떠올릴 때가 아닌데 말인데….
“저기, 히나타 군,”
“응응, 테츠 군! 덕분에 살았네! 고마워-! 그나저나 미도리 군, 오늘 당번 활동은 벌써 끝난 거야?”
“아, 응….”
히나타는 티가 나게 테토라의 시선을 피하고 있는데, 테토라는 뭐가 그리 말하고 싶은 건지 끈질기게 히나타를 눈에 담고 있었다. 아, 눈치 보여…. 분명 두 사람, 뭔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둘은 아니라고 했지만 싸운 걸까…? 제발 싸울 거면 나 없는 곳에서 싸워줘…. 불안함을 느낀 미도리가 부 활동을 핑계 삼아 도망가야겠다고 생각하던 중,
“히나타 군,”
“아-, 얼른 가봐야겠다! 유우타 군이 먼저 연습실에 가버렸거든!”
“히나타 군! 제 말 좀 들어주십셔!”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자리를 뜨려는 히나타의 손목을 잡은 테토라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아…. 내가 이럴까 봐 도망가고 싶어 했던 건데…. 지금이라도 몰래 가면 안 될까…. 우울해. 집에 가고 싶어….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미도리가 두 사람 몰래 한 발자국 물러선다. 티 나지 않게 도망가는 게 목표다.
“… 테츠 군, 다음에 얘기하자. 유우타 군이 기다리고 있단 말이야-.”
응? 진지한 테토라의 목소리와는 달리 가벼운 애교가 섞인 목소리로 말한 히나타는 테토라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피하는 거, 제가 한 고백 때문이라면,”
“테츠 군!”
“….”
화들짝 놀라 테토라의 말을 끊는 히나타의 목소리. 응…? 뭐라고…?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생각지도 못한 내용에 미도리의 두 눈이 번쩍 뜨인다. 고, 고백? 두 사람, 지금 나 놀리려고 장난치는 거야…? 너무 놀라면 비명도 못 지른다고 누가 그러던데, 미도리가 티 나게 놀라지도 못하고 몸을 굳힌 채 눈만 데구루루 굴린다. 하하 웃으며 장난으로 넘기기에는 너무나도 진지한 두 사람의 모습이 당황스럽고 혼란스럽다.
“… 못 들은 거로 하겠다고 했잖아.”
끈질긴 남자는 인기 없어, 테츠 군! 금방 다시 돌아온 히나타의 평소 모습. 싱긋 웃으며 테토라의 말을 받아치는 목소리가 가볍기 짝이 없다. 계속해서 진지한 얼굴로 히나타를 잡은 테토라만 아니었다면 역시 두 사람, 나를 놀리려고 했던 거였지 라며 큰소리를 쳤을 텐데.
“잠시 얘기 좀 해여, 히나타 군.”
요즘 한동안 저 피해 다녔지 않슴까. 도망치지 말고 얘기 좀 했으면 함다. 히나타와는 달리 진지하다 못해 딱딱한 테토라의 목소리에 미도리까지 움찔, 몸을 떨었다. 올해 초, 답례제때의 기억이 난다…. 테토라 군 화내면 무서운데…. 으, 나는 어쩌다 이 사이에 껴있는 거야…. 누가 나 좀 구해줘….
“다음에. 다음에 하자, 테츠 군.”
손목을 비틀어 빼낸 히나타가 등을 돌린다. 짧게 미도리와 시선이 부딪힌 순간 어색한 웃음을 보이는 히나타가 낯설다. 테토라의 손자국이 남은 히나타의 손목이 눈에 띄었다. 원하지 않았지만 대충 두 사람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버린 미도리가 슬쩍 테토라의 눈치를 본다. 히나타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미도리는 알 수 있었다.
조용하고 평온한 삶은 이제 망했다고.
“저기 미도리 군, 저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슴다.”
미안함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우물쭈물하던 미도리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한 테토라가 전속력으로 복도를 달려간다. 히나타를 따라간다는 건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절대 알고 싶지 않았지만…. 진짜 우울하다. 이대로 집에 가지도 못하고 부 활동을 가야 한다는 것도, 또 친구의 어려워 보이는 사랑을 알아버렸다는 것도. 아… 가능하다면 진심으로 지구에서 탈출하고 싶어…. 혼자 터덜터덜 부실로 향하는 미도리의 발걸음이 바위보다 무겁다.
◌•◌•★•◌•◌
미도리는 오늘도 침울했다. 정말 진짜 많이…. 어제 볼 거 못 볼 거 다 본 후로 생각이 많아져서 괜히 밤에 잠도 못 잤는데 오늘도 일찍 등교해야 한다니. 당번 2일 차. 시간이 빨리 흘러 어서 방학이 왔으면 좋겠다. 그럼 매일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될 텐데. 유성대 앞으로 온 공연 의뢰가 몇 개 있다고 들었으니 연습과 공연 준비도 해야겠지만… 적어도 이렇게 일찍 가지 않아도 될 테니까….
“그럼 이렇게 불편하지는 않을 거 아니야….”
신발 앞코로 애꿎은 운동장의 모래를 쿡쿡 건드린다. 교실에 들어가기 싫은 마음이 앞서다가도 혹시나 어제처럼 누군가를 만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앞선다.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오늘도 만날까…? 어제처럼 히나타 군과 둘이서만 있어야 한다니…. 모든 것을 알아버린 지금 상태로서는 죽어도 피하고 싶은 상황이었다. 테토라와는 불가피하게 교실에서 보겠지만 딱히 둘만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괜찮지 않을까. 테토라 군도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어제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테고….
느긋하게 걷다 불편한 사람을 만나서 고통받을 바에야 빨리 당번 일을 끝내고 교실에서 쉬자는 결론으로 다다른 미도리의 걸음걸이가 점점 빨라진다. 운동장을 지나 신발장까지, 어느 때보다 빠르게! 다행히 건물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빨리 신발 갈아신고 교실로 들어가야지. 신발장도 미도리에게는 위험 가득한 장소였다. 얼마나 많은 만남이 신발장에서 이루어질까. 알고 싶지도 않고 궁금하지도 않지만 일단 피하는 게 상책이다.
신발장을 열었다. 익숙한 신발장 속의 광경. 실내화를 꺼내 신고 운동화를 신발장 안에 집어넣는다. 매일 생각 없이 지나가는 순간이었지만 오늘따라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걸까. 건물 안에 오로지 미도리밖에 없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그렇겠지…. 조용한 실내와 신발장 특유의 공기만이 미도리를 감싼다. 신발장에서 교실까지의 거리는 불과 몇십 발자국. 교실을 안전지대라고 부를 수는 없었지만 그나마 안전한 곳까지의 도착이 얼마 남지 않아서 방심한 걸까. 조용히 신발장 문을 닫는 순간 들리는 아침 인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안녕하심까, 미도리 군.”
“아… 테토라 군도 안녕…. 일찍 왔네…?”
“부실에서 짧게 운동하고 가려고 일찍 왔슴다. 그러고 보니 미도리 군은 이번 주 당번이었져.”
“응….”
신발장은 어째서 반별로 같은 줄을 쓰게 하는 걸까.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어색하고 또 민망한 아침이 되어버렸다고…. 반별로 같은 줄 신발장을 쓰게 한 사람을 원망하면서 마저 문을 닫은 미도리가 슬쩍 테토라의 눈치를 본다. 어제 히나타 군이랑 잘 풀었으려나. 어떻게 되었던지 거북한 일은 없으면 좋겠는데. 어제 원하지도 않게 알아버린 친구의 연애사는 불편하고 안쓰러우면서 또 조금 처량했다. 가끔 덜렁거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만 빼면 그래도 또래 중에서는 어른스럽고 든든하다고 생각했던 테토라의 짝사랑이라니…. 어느 상황에서도 남자다움을 외치고 있는 그가 애달픈 짝사랑 중이라는 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또 어떻게 보면 어울리는 것도 같달까. 어렵네….
“미도리 군, 어제 미안했슴다. 미도리 군이 신경 쓰게 만들었네여.”
“아… 아니야…. 어제, 잘… 풀었어?”
“따라간다고 따라갔는데 놓쳐버렸슴다. 잘 얘기 해보고 싶은데, 계속 피해서 답답함다.”
“아….”
슬쩍 입꼬리를 올리면서 미도리를 쳐다보는 테토라가 머쓱하다는 듯 볼을 긁적인다. 들킨 김에 다 말하자는 생각일까 아니면 미도리가 믿을만하다고 생각해서일까. 조금 무안해하면서도 미도리에게 속마음을 말해주는 테토라가 조금 고마우면서도 아주 매우 당황스러웠다. 근데… 나는 무슨 말을 해줘야 하는 건데…?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단 말이야…!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아무도 만나지 않기를 바랐지만, 이제는 제발 아무나 와서 이 대화의 주제를 바꿔줬으면 좋겠다.
“들어갈까여?”
어색하고 민망하게 서 있는 미도리를 향해 테토라가 싱긋 가볍게 웃으며 말한다. 속마음을 들킨 걸까.
“응….”
끄덕이는 고개에서 삐걱삐걱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 우울해…. 오늘도 아침부터 세상에서 탈출하고 싶어졌다.
별다른 말없이 걷는 두 사람의 걷는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진다. 신발장부터 계단이 있는 곳까지의 짧은 복도를 걸으면서 평소라면 어색하지 않았을 침묵이었겠지만 오늘따라 죽고 싶을 만큼 어색하다고 느끼는 건 미도리뿐일까. 테토라는 다른 생각에 잠겼는지 흘끔거리는 미도리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오히려 다행이려나.
“그럼 이따 봐여.”
“응….”
부실로 간 테토라의 뒷모습을 짧게 쳐다보던 미도리가 하아- 한숨을 쉬며 교실로 향한다. 또 다른 힘든, 하루의 시작이었다.
☆
아, 오늘은 집에 돌아가면 야채가게 도와야 하는데…. 초연한 표정의 잘생긴 미남이 창문 너머를 바라보는 표정은 지나가는 모두의 가슴을 떨리게 하지 않을까. 비록 칠판에 적힌 빼곡한 필기를 지우는 중이라고 해도 말이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이 눈부시다. 에어컨 덕분에 시원한 실내와는 다르게 밖은 꽤 덥겠지. 교실에서 바로 집으로 가는 텔레포트라던가 쉬운 방법이 생기면 좋을 텐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리던 미도리의 시야에 토모야와 이야기를 나누는 테토라가 들어왔다. 아무래도 같은 시기, 같은 학년에 유닛의 리더가 된 두 사람이니 더 가까워진 듯했다. 뭐, 작년부터 친하기도 했었지. 같은 반도 아닌데 최근 들어 반으로 찾아오고 찾아가는 일이 잦아진 걸 보니 방학 중에 합동으로 공연이 있을 예정인가…? 라비츠도 작년과는 달리 이곳저곳에서 섭외가 많이 들어온다고 하던데. 다들 1학년 때와 변하지 않은 것 같으면서 또 많이 변했다는 게 느껴졌다. 테토라와 토모야만 봐도 한 유닛의 든든한 리더로써 열심인 걸 보면, 졸업한 선배들도 미도리와 같은 말을 하지 않을까. 1학년 때는 쉽게 느끼지 못했던 선배들의 노력하는 모습을 테토라에게서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칠판지우개를 내려놓고 자리로 돌아가는 미도리의 발걸음이 느릿느릿하다. 긴장한 상태로 하루를 지내려니 피곤해….
“아, 미도리 군! 잠시만여.”
“응…?”
책상으로 돌아가는 미도리의 발을 멈춘 건 테토라의 부름이었다. 시선을 돌리니 마주친 토모야가 방긋 웃는다. 아침의 어색함이 아직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그래도 토모야가 함께 있으니 괜찮으려나.
“여름 방학 기간에 들어온 공연 의뢰가 몇 개 있어서 일정을 맞춰보려고 하는데여, 혹시 어려운 날 있슴까?”
테토라의 책상 위에 어지럽게 펼쳐진 종이 위를 가리킨 손가락을 따라 시선이 옮겨간다. 테토라의 글씨체로 적혀진 몇 개의 날짜들을 쳐다보며 미도리가 고개를 가볍게 흔든다.
“방학에 특별한 약속 없으니까….”
“그렇슴까? 잘됐네여!”
후배들도 어려운 날은 없다고 했으니 시노부 군한테만 맞추면 될 것 같슴다. 씩 웃으며 답하는 테토라의 얼굴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라비츠랑 합동으로 하는 거야?”
“음, 사실 합동이라고 하기보다는 무대 위에서 겹쳐지는 부분이 조금 있을 것 같아서. 근데 우리랑 유성대말고 다른 유닛에도 의뢰가 온 것 같더라. 아마 트윙크랑 스위치도 거의 확정이었던 것 같은데…. 여름 방학에 맞춰서 며칠을 이어서 하는 큰 축제를 계획 중이래.”
“아….”
“아마 출연이 확정되면 다 같이 모여서 연습을 몇 번 해봐야 할 것 같슴다. 이번 방학도 바쁘게 보내겠네여.”
아직 모르는 건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 토모야의 말에 왜 미도리 혼자 움찔, 긴장해야 하는 걸까. 있지…,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아…. 이게 뭐야…. 우울해…. 오히려 당사자인 테토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 같이 연습을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하는데 혼자 겁먹는 모습이라니.
“응, 그래야 할 것 같아. 트윙크가 시간 맞추기 조금 어려울 것 같기는 하지만…. 물 들어올 때 열심히 노 저어야 한다고 들어오는 의뢰는 대부분 받는 것 같더라.”
히나타나 유우타, 둘 다 대단해. 우리는 그렇게 못하겠던데. 감탄이 섞인 토모야의 말에 살짝 미소 지은 테토라의 시선이 책상 위 서류로 향한다.
“응… 요즘 바쁘다고 하는 거 들었어….”
“둘 다 항상 열심히 하는 모습이 정말 멋진 것 같슴다. 저희도 질 수 없져…!”
기운 빠지는 미도리의 대답과는 달리 힘이 넘치는 테토라의 말에 토모야가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도 더 열심히 해야지. 나랑 하지메는 체력 기르려고 운동도 하고 있어. 작년보다는 좋아졌지만, 아직 갈 길이 머네.”
뭐, 열심히 해도 미츠루처럼은 무리겠지만. 가벼운 웃음이 섞인 토모야의 대답에 미도리의 긴장이 조금 풀리는 듯하다. 분명 테토라도 답답할 텐데 개인의 감정이라고 티를 내지 않는 모습이 조금 안쓰러우면서도 어른스러웠다.
“토모야 군, 괜찮으면 가라테부 연습할 때 같이 해도 좋으니까여.”
반쯤 진심이 담긴 목소리에 토모야가 씩- 웃으면서 고개를 젓는다.
“가라테부랑 같이 운동이라니… 아직은 좀 더 살고 싶달까….”
“토모야 군을 위해서 난이도를 줄여볼 테니까요. 기다리고 있겠슴다!”
테토라도 가벼운 웃음으로 답한다. 마침 울리는 종소리가 쉬는 시간의 끝을 알렸다.
“일단 가볼게! 날짜 정해지면 알려줘. 오늘도 고생하고!”
“토모야 군도 힘내십셔.”
“안녕…. 나도 자리로 가야겠다….”
토모야가 빠른 걸음으로 교실에서 나간다. 미도리도 자리로 돌아와 교과서를 미리 책상에 꺼내놓았다. 아직 선생님께서 들어오시기 전이라 그런지 조금 부산스러운 교실. 미도리의 대각선 자리에 앉은 테토라에게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갔다. 책상 위에 정신없이 올려져 있던 서류는 그새 다 정리한 건지 미도리처럼 미리 교과서를 올려둔 테토라가 책상의 빈 곳에서 의미 없이 펜을 굴리고 있었다. 데굴데굴, 양옆으로 굴러가는 검은 색 펜. 아, 전에 히나타 군이 돌려주고 간 펜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께서 교실에 들어오셨다. 고개를 든 테토라의 시선이 펜에서 떨어진다. 멍하니 테토라의 뒷모습을 보던 미도리도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교과서로 시선을 옮긴다. 괜히 나까지 같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아…. 살려줘….
◌•◌•★•◌•◌
수요일이었다. 주말을 뺀 일주일의 중간 날. 오늘만 지나면 이틀밖에 남지 않은 거니까 조금만 참자. 그래도 오늘은 교실까지 오는 길에 아무도 안 만났잖아…. 자기 자신에게 하는 위로의 내용이 조금 이상했지만 나름의 위로가 된 것인지 미도리가 청소도구함에서 빗자루를 꺼내 들었다. 교실에 도착하자마자 교무실에서 일지를 반에 가져다 두고, 커튼을 걷고, 교실에 있는 화분에 물을 준 후에 교실 바닥을 깨끗하게 쓸어야 하는 자잘한 일이라 아주 어렵지는 않았지만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혼자 해야 한다는 게 조금 싫기도 하고 처량해 보인달까, 도와줄 사람도 없고, 또 귀찮고…. 아무튼 그냥 싫었다. 당번 언제 끝나지. 이럴 때만 시간은 천천히 가더라…. 아, 우울해…. 하기 싫은 표정으로 바닥을 쓰는 미도리의 손끝이 야무지다. 싫다고 하면서도 성실하게 부모님의 야채가게를 도운 탓인지 어디 가서 일 못 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았으니 청소가 퇴짜맞을 일은 없겠지.
그래도 3일째라고 손에 익었는지 생각보다 일을 빠르게 끝냈다. 빗자루를 청소도구함에 가져다 놓은 미도리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무도 없는 교실. 얼마나 처량 떨기 좋은 장소인가. 책상에 엎드리고 눈을 감으니 더 잘 느껴지는 빈 교실의 느낌. 내일부터는 한 10분 늦게 나와도 되지 않을까. 째깍거리는 시계의 초침 소리를 들으며 시간을 흘려보내 본다.
☆
“저기 미도리 군.”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건드리는 느낌에 정신이 번쩍 든다. 나 잠들었던 거야…?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니 분명 아까와는 달리 시끌벅적한 교실은 반 친구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테토라와 시노부는 자리에 없는 게 아직 HR 시간이 시작하려면 시간이 좀 남은 건가…? 지금 몇 시? 멍하니 시간을 확인하는 미도리의 어깨를 톡톡 건드리는 느낌이 든다.
“미도리 군!”
“어, 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보이는 주홍빛의 머리와 초록빛의 눈동자. 아, 히나타 군이다. 테토라가 없을 때를 노리고 찾아온 걸까. 손에 들고 있는 파일 하나가 눈에 띄었다.
“자고 있는데 깨워서 미안. 이거 축제 의뢰 관련한 요구사항 모아둔 파일인데 전해주려고 왔다가 유성대 사람들은 미도리 군밖에 없길래….”
“아…. 아니야, 깨워줘서 고마워….”
검은색의 파일을 건네받은 미도리가 고개를 흔들었다. 설마 히나타가 A반에 아무렇지 않게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서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그래도 공적인 부분에서는 매서울 정도로 엄격한 히나타이니까 이상하지는 않았다. 아니면 두 사람의 일이 잘 해결된 걸 수도….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은 형광펜으로 줄 쳐놨대.”
“응…. 고마워.”
히나타의 말에 대답하면서 시선을 뒷문에서 뗄 수 없는 이유는 왜일까. 두 사람의 일이 잘 풀렸으면 사, 사귀는 사이가 됐을 텐데 자는 미도리를 깨우기보다는 문자를 하지 않았을까…?! 아니, 전해달라고 깨울 수도 있겠지만…. 며칠 전 히나타에게 얼떨결에 받은 놀이공원 티켓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느낌이 ‘잘 해결되어서 좋은 사이가 되어버렸어!’는 아닌 걸…! 이럴 때만 빨리 돌아가는 자신의 머리가 원망스러웠다.
“뒤에 뭐 있어?”
눈치 빠른 히나타가 미도리의 시선을 놓칠 리가 없었다. 아니, 그게…. 뭐라고 말해야 하지. 테토라가 교실로 오기 전에 돌아가라고? 어떻게 대놓고 말해…. 이런 고민을 해야 하다니… 우울해….
“그, 곧 종 울릴 테니까…,”
허둥지둥 설명하려는 미도리의 마음도 모르고 닫혀있던 뒷문이 열리며 테토라가 들어왔다. ……… 나, 집에 가도 될까?
“아…. 유우타 군임까?”
…응? 아무리 답답해도 반 친구들이 있는 곳에서 티를 내며 싸우지는 않을 거라며 억지로 자신을 안심시키던 미도리의 뒤통수를 때리는 말이었다. 잠결에 긴장한 탓에 유우타 일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으까.
“응. 마을 축제 공연 관련된 요구사항 파일 전해주러 왔어. 형이 꼼꼼하게 봐야 하는 부분은 밑줄 쳐놨다고 꼭 읽어보래.”
인제야 이해가 되는 부분이었다. 히나타 군이 밑줄 쳐놨다는 뜻이었구나…. 너무나도 당연하게 유우타를 히나타로 착각하고 난리였던 자신이 창피했다.
“감삼다. 히나타 군에게도 꼭 고맙다고 전해 주세여.”
“응. 형이 갑자기 오늘은 나 대신 자기가 연습하고 싶다면서 나한테 서류 일 밀어놓고 도망가버려서 내가 고생이네.”
“히나타 군답네여.”
아, 알고 있는 걸까.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테토라는 씩 웃으면서 대답하지만, 미도리는 그럴만한 강심장이 되지 못했다. “아무튼, 아직 전해줘야 하는 유닛이 남아있어서… 먼저 갈게! 오늘도 고생해-.”
아, 시노부 군한테 인사 전해줘! 서둘러 교실을 빠져나가는 유우타의 뒷모습이 아무리 봐도 히나타와 똑같았다. 목소리와 말투도 비슷한데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 건지.
“테토라 군은 히나타 군이랑 유우타 군 구별… 잘하게 됐네.”
유우타에게 받은 파일을 테토라에게 전해주며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음… 두 사람, 조금 다르지 않슴까?”
“다르다고…?”
“생긴 게 다르다기보다는, 그… 느낌이 말임다.”
“아……. 응….”
미도리의 시원찮은 반응에 테토라도 설명을 해주고 싶어 하는 건 알겠지만 느낌이 방법이라는 말을 들으면 할 말이 있었다가도 없어질 것 같았다. 차라리 사랑의 힘이라고 하지 그랬어…. 아니야. 테토라가 정말 그런 말을 한다면…. 으, 상상만 해도 얼굴이 찌푸려졌다. 차라리 물어보지 말 걸 그랬나 봐….
◌•◌•★•◌•◌
으… 우울해…! 어제 시간이 좀 남아 여유로웠던 것을 생각해 침대에서 늦장을 부렸던 게 잘못이었다. 5분만, 5분만 미루던 자잘한 시간이 모여 무시할 수 없는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길쭉길쭉한 다리로 후다닥 1층으로 내려가 신발을 신는 미도리의 머리가 부스스하다. 급하게 입었는지 정갈하지 못한 교복까지. 딱 봐도 늦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옷차림이랄까.
“도시락 챙겨가.”
“으… 고마워…. 다녀올게.”
어느새 다가온 형이 도시락을 건넨다. 도시락을 가방에 집어넣고 집을 나섰다. 어제와 비교하면 조금 흐린 날씨. 연회색의 구름이 하늘을 가렸다. 안 그래도 손님이 있는 시간이 아니라 스산하게 느껴지는 상가 길이 더 우울해지는 것 같달까. 그냥 미도리가 우울한 걸 수도 있지만.
학교로 가는 길, 꽤 많은 학생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곧 미도리가 등교하던 시간 때라 그렇겠지. 망했다…. 어차피 늦은 거 천천히 가면 안 될까…. 서두르던 미도리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진다. 3일 동안 열심히 했으니까… 하루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안될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핑계를 찾아보려는 미도리의 마음이 분주하다.
“히히-! 미도쨩, 이제 등교하는 건가요? 소라도 지금 학교에 갑니다!”
“아, 하루카와 군….”
아침부터 싱글벙글, 밝고 활기찬 목소리의 소라를 보니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았다.
“미도쨩, 어두운색이 보이네! 무슨 일이 있는 걸까나?”
“아…. 사실은 당번이라 일찍 학교에 갔어야 했는데… 늦장 부리는 바람에 늦어버렸거든…. 당번이라고 일주일이나 일찍 학교를 가야 한다니…. 우울해….”
고개를 갸웃, 걱정을 표하는 소라에게 마음을 털어놓는 목소리가 한없이 침울하다. 소라의 가벼운 발걸음과는 달리 혼나기 직전의 아이처럼 미도리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줘야 한다고 선배한테 배웠네-! 우울한 미도쨩을 소라가 도와주겠습니다!”
미도리를 보며 방긋 웃는 소라의 목소리가 마치 천사의 목소리로 들린다. 서글펐던 아침이 조금 밝아지는 기분.
“저, 정말?”
“정말이네-! 일을 나눠서 하면 빨리 끝난다네!”
“고마워…! 하루카와 군…!”
“히히-. 미도쨩의 색이 다시 밝아졌네! 예쁜 색이라 소라도 기분이 좋습니다!”
하루카와 군과 같은 반이라 다행이다…. 진심으로…! 항상 우울하다, 지구를 탈출하고 싶다 등의 생각을 자주 하는 미도리였지만 친절하게 도움을 주려는 친구가 있다니, 아직 세상은 살만하다.
“다음에 하루카와 군도 도움이 필요하면, 내가 꼭 도와줄게…!”
정말이야! 굳은 결심이 담긴 미도리의 목소리에 소라가 머뭇거린다. 혹시 고민 중인 문제가 있던 걸까 싶어 미도리도 괜히 긴장하게 됐다.
“사실은… 어제 히나짱을 만났는데, 히나짱의 색이 너무 아파 보이는 색이라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 그… 요즘 바빠서 그런 게 아닐까…?”
미안해…! 미안해, 하루카와 군! 꼭 도와준다고 말했지만, 히나타의 고민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면 테토라의 고백을 말해야 하니까…. 아무리 알고 싶지 않게 알아버렸다고 해도, 함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소라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지만, 대답을 해주지 않아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어보고 싶었네!”
“응…. 그… 음….”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정말 모르겠다. 사실은 우리가 도와줄 수 없는 문제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할 수 있는 말이 없어 머뭇거린다.
“앗, 미도짱의 색이 다시 어두워졌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소라는 미도짱 일을 열심히 도와줄 거네-!”
“아, 고마워….”
미도리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소라가 한 손을 번쩍 들고 말하지만 그래도 찝찝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모른 척하고 싶어도 계속 눈에 보이고 들리는 걸 어떻게 해…. 소라와 이야기하는 사이에 학교에 도착해버렸다. 게임 속 이야기처럼 가능하다면 그냥 오늘 하루를 삭제시킬 수 있으면 좋겠다….
☆
짜잔! 오늘 하루가 삭제되었습니다. 라는 문구가 허공에 뜨면서 내일로 넘어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미도리의 이루어질 수 없는 꿈과는 달리 현실은 서글프기만 했다. 시간이 조금만 더 빨리 지나가면 좋을 텐데…. 미도리의 마음처럼 흐리기만 한 날씨는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유성대 연습도 있는데, 이런 마음으로는 절대 연습하고 싶지 않은걸…. 이건 미도리의 잘못이 아니었다. 음…, 굳이 따지자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지 않는걸. 언제는 연습할 마음이 있었다는 것처럼 핑계를 대보는 미도리의 표정이 우울하다. 쓰레기통 앞에 서서 잔뜩 우울해해봤자 소용은 없겠지만. 빌려 놓은 연습실에 먼저 가서 준비하겠다며 교실을 나간 테토라와 오늘은 학생회 일로 불가피하게 연습에 참여하지 못하는 시노부가 그리워진다. 하…. 쓰레기통만 비우면 되는데 그 후로 연습이 있다고 생각하니 이마저도 고통스럽다. 하지만 늦게 가면 테토라 군이 잔소리할 것 같고…. 오늘은 시노부 군도 없는데 연습… 잘할 수 있을까…?
느릿느릿, 하지만 야무진 손길로 쓰레기봉투를 묶은 미도리가 미리 챙겨둔 가방을 어깨에 메고 교실을 나선다. 문이 잘 잠겼나 확실하게 확인까지 하고, 학교의 뒤편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겁다. 이대로 그냥 집에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교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그런지 몇 걸음 걷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학교 쓰레기를 모으는 곳에 도착해버렸다. 다른 반에서 버린 쓰레기봉투가 모여 있는 곳으로 가니 좋지 않은 냄새가 코를 찌른다. 으…. 잔뜩 찌푸려진 얼굴. 흡, 숨을 참고 걸음을 빨리한다. 멀리서 던져버릴까 잠깐 고민하던 미도리가 혹시나 터지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두어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어…? 조금 멀리 떨어진 담장 위에 앉아있는 익숙한 뒷모습에 미도리가 멈칫, 걸음을 멈춘다. 혼자서 뭐 하는 거지…? 분명 점심 먹을 시간도 없이 바쁘다고 했던 히나타였다. 이번에는 맞겠지…. 담장 앞쪽에 누가 있는 건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특유의 장난기 넘치는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았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지도 않았다. 혼자 있는 것 같은데 뭘 하는 건지. 점점 숨이 막혀온다. 으…. 어떡하지 짧게 망설인 미도리가 쓰레기봉투가 모여 있는 곳에 들고 있던 봉투를 조용히 내려놓는다. 봉투를 놓기 위해 자리를 옮기니 살짝 보이는 히나타의 얼굴은 아무런 표정을 담고 있지 않았다. 무표정이라고 하기보다는 텅 비어있는 듯한 얼굴.
비를 가득 담고 있을 것 같은 구름을 보고 있는 걸까. 아니면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곳을 찾아온 걸까. 그 와중에 담장에 가뿐히 앉아있는 것도 참 히나타답다고 생각했다.
미도리가 천천히 뒷걸음질로 자리를 빠져나온다. 아는 척을 하는 것까지는 괜찮았지만 그 후의 어색함과 불편함은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기도 했고, 무엇보다 히나타의 표정이 평소와는 달라서 자리를 피해줘야 할 것 같달까. 으…. 왜 이런 상황이 계속 생기는 거야…. 우울해… 자신도 모르게 계속 이런 일들 속에 던져지는 것 같아 서러워진다. 유성대 연습이고 뭐고, 나 이제 집에 가고 싶어…!
◌•◌•★•◌•◌
드디어 마지막 날이다…! 길고 길었던 5일의 마지막 날. 이번 학기의 당번 활동이 오늘 끝나기도 하고, 또 여름 방학이 다가온다는 조금의 설렘으로 등교하는 미도리의 발걸음이 흔치 않게 가볍다. 오늘은 어제와 달리 늦잠도 자지 않았으니 급하게 학교로 가야 할 필요도 없다. 창밖에서 들리는 커다란 빗소리가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한동안 무자비하게 더웠던 터라 조금 반가울지도….
“다녀오겠습니다….”
“차 조심하고, 잘 다녀와-!”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계신 엄마에게 인사하고 집을 나선다. 우산을 쓰고 밖으로 나오니 투두둑 떨어지는 커다란 빗방울이 리듬을 만든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들리는 물소리와 더위가 씻겨 내려가는 것 같은 시원하고 축축한 공기.
일주일 동안 날 힘들게 했던 이른 기상이여 안녕. 사실 꽉 채운 일주일도 아닌 주중의 5일뿐이었지만, 평범하고 또 평범할 거라고 생각했던 5일은 참 다사다난했다. 같은 반 친구이자 유닛 동료인 테토라의 짝사랑을 알아버린 게 잘못이라면 잘못인 걸까. 원해서 알아버린 건 아니지만. 이렇게 생각하니 조금 억울하네…. 그래도 오늘은 마지막 날. 지금보다 더 나빠질 것도 없을 거라 생각하니 어떻게든 되겠지 싶기도 하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학교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보송한 침대에 누워 귀여운 마스코트 캐릭터 인형을 끌어안고 다시 자고 싶었지만….
미도리가 익숙하게 정문을 지난다. 무거운 빗방울에 나뭇잎들도 억지로 위아래 흔들리며 춤을 추는 듯하다. 나 같네…. 괜히 아련한 눈빛으로 나뭇잎을 쳐다본 미도리가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쪽으로 우산을 기울인다. 이럴 때일수록 키가 큰 게 더 싫어…. 우산으로 가려지는 부분이 한정적이잖아…. 으… 갑자기 우울하다. 빨리 실내로 들어가기 위해 걸음 속도를 높여본다. 이미 바지 아랫단은 축축하게 젖어버려 질척질척 살에 닿는 기분이 불편하기만 하다. 서둘러 현관의 지붕 아래로 들어간 미도리가 우산을 접었다. 움직일 때마다 우산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이 고여 금세 작은 웅덩이를 만든다. 비 때문에 오늘 바닥 청소하려면 힘들겠다…. 두어 번 우산을 탁탁 털고 안으로 들어가는 미도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움찔, 발걸음을 멈춘다. 안쪽에 있는 신발장 뒤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
“… 히나타 군!”
“순간의 감정일 거라고 말했잖아. 테츠 군, 누굴 좋아해 본 적이 없으니까 헷갈리는 거야.”
집중해서 들어보니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바로 누구인지 알 수가 있었다. 유리문 손잡이를 잡은 미도리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아니 저 두 사람은 왜 학교에서 저러는 거야. 아니 그 전에, 왜 일찍 나와서 툭하면 나랑 부딪히는 거야…. 이러지 마. 우울해…. 당번이 뭐라고 겨우 며칠 일찍 나왔는데 거의 매일 보는 두 사람이 이제는 무서울 지경이다. 그나저나 나 들어가야 하는데 저기서 싸우고 있으면 들어갈 수가 없다고…!
“제 마음을 왜 히나타 군이 다 안다는 듯 말하는 검까?!”
“… 테츠 군, 손 놔줘.”
격해진 테토라와는 달리 차가울 정도로 차분하게 들리는 히나타의 목소리. 만약 히나타가 저런 목소리로 미도리에게 말했다면 얼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텐데.
“피하지 마십셔, 히나타 군. 그날 이후로 제 눈을 쳐다보지도 않고 있잖슴까. 후회도 많이 했슴다. 제가 고백하지 않았다면 히나타 군이 저를 피하는 일도 없었겠져.”
“….”
“그런데 고백하지 말 걸이라는 후회보다는 내가 아직 의지할 만큼의 믿음을 주지 못했나보다, 히나타 군이 아직 나에게 마음을 다 보여줄 만큼 내가 든든하지 못했구나 하는 후회가 계속 듬다.”
“….”
흔들림 없는 테토라의 목소리에 진심이 가득 담겨있다. 무슨 마음으로 저런 말을 하는지, 언젠가 미도리도 알 수 있을까. 한 발자국, 아니 그보다 한참을 앞서나간 테토라는 어른이 되어가는 걸까. 좋아하는 사람에게 솔직하고 곧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테토라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진지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어도 되는 걸까. 물론 안되지! 하지만 나, 교실로 올라가야 하고…. 우물쭈물,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다시 한번 테토라의 목소리가 들린다.
“히나타 군, 좋아함다. …순간의 감정이 아님다.”
전보다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 꾸밈없이 마음을 전하는 테토라의 고백이 참 테토라답다고 생각했다.
“… 난,”
한참이 지난 후 들리기 시작한 히나타의 목소리에 미도리도 같이 꿀꺽, 침을 삼킨다. 둘 사이에 끼이는 거 사실 좀 힘들다고 생각했지만… 꽤 잘 어울린단 말이야, 두 사람….
어느 순간부터 두 사람의 사랑을 응원을 하는 미도리의 뒤에서 걸음 소리가 들린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미도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시노부와 이상한 표정의 토리, 그리고 옆에서 우산을 들어주고 있는 유즈루가 보인다.
“미도리 군! 거기서 뭐 하고 계시오?”
“타카미네, 그 자세 되게… 이상해 보이는 거 알아?”
안에 있는 사람들 몰래 훔쳐 듣는 것 같은 이상한 자세잖아. 토리의 말에 움찔, 미도리의 시선이 흔들린다.
“도련님, 정말 타카미네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훔쳐보고 있었다고 해도 그렇게 대놓고 말하는 것은 실례입니다.”
“으… 우울해…….”
귀여운 시노부와 히메미야와 그리고 화백님의 가슴 떨리는 조합이 미도리에게 다가왔지만 찔리는 게 있어서 그런지 마음의 안정이고 두근거림이고 다 버리고 도망가고 싶어졌다.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 지구를 탈출하고 싶어…. 우울해…! 누가 나 좀 숨겨줘. 우울함을 가득 담은 얼굴의 미도리가 재빨리 잡고 있던 문에서 손을 떼었다.
“미도리 군, 당번이라 일찍 온 것이오?”
우산을 접고 미도리에게 다가온 시노부가 물었다. 뒤따라온 토리와 뒤에서 우산을 가볍게 터는 유즈루의 시선까지 받고 있으려니 땅이라도 파서 도망가야 할 것 같다.
“응…. 다 같이 온 거야…?”
“두 사람과는 학교 앞에서 만났소이다!”
“학생회 회의가 있으니까. 근데 타카미네는 뭐 하는 중이었는데?”
어떻게 말을 할 수가 있을까. 당번이라 일찍 학교에 왔다가 친구들의 긴장 넘치는 사랑 고백이 신발장에서 이루어지고 있어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몰래 듣고 있었다고….
“그냥……. 들어가야지….”
시선을 바닥으로 떨군 미도리가 웅얼거린다. 테토라와 히나타는 이야기를 다 끝냈을까. 시노부가 들고 있는 우산에서 물방울이 하나둘 떨어진다. 꿀꺽, 긴장감에 마른 침을 삼킨 미도리가 손잡이를 잡았다. 두 사람, 아직도 얘기가 안 끝났으면 어떡하지…? 지금 들어가도 되는 걸까. 혹시 들어가서 마주친다면 어떡하지…? 뭐라고 말을 해야 두 사람도 그리고 나도 어색하지 않게 넘어갈 수 있을까. 끝이 보이지 않는 고민에 미도리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타카미네님, 들어가지 않으실 겁니까?”
미도리가 머뭇머뭇하는 사이 어느새 옆에 다가온 유즈루가 물었다. 깜짝 놀란 미도리가 고개를 저었다.
“드, 들어갈게요!”
평소라면 화백님께 사인해달라고 몇 번이고 물어봤을 텐데….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것도 못 하잖아…! 으…. 화백님이 옆에 계시는데 더 추한 꼴을 보일 수는 없었다. 테토라 군, 히나타 군… 미안해! 꾹 눈을 감고 문을 연 미도리가 일부러 걷는 소리를 크게 냈다. 만약 아직 있다면 여기 사람들 들어왔으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빨리 움직인 미도리가 조심스레 신발장 뒤쪽으로 시선을 던진다. 걱정과는 달리 텅 비어있는 공간에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잘 풀렸기를… 조심히 바라본다.
☆
“저… 테토라 군.”
쉬는 시간 용기를 내서 테토라의 자리로 찾아간 미도리가 조심스레 테토라를 불러본다. 오늘도 정체 모를 서류와 씨름을 하고 있는지, 쉬는 시간인데도 테토라의 책상 위에는 하얀 종이가 펼쳐져 있었다.
“무슨 일임까, 미도리 군?”
“아…. 아니야….”
미도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을 쳐다보는 곧은 테토라의 시선을 피한다. 아무래도 괜히 찾아온 것 같았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걸….
아침에 학생회실로 가는 세 사람과 헤어지고 어떻게 해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다 들어온 교실은 미도리의 예상과는 달리 아무도 없었다. 차라리 없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려나…. 가방을 자리에 내려놓고 빗자루질을 시작했던 미도리였지만 두 사람의 사적인 일을 엿들었다는 죄책감을 모른 척할 수가 없어 용기를 낸 것이었는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있지, 사실 테토라 군이 히나타 군에게 고백하는 거 나도 다 들었어…? 아니면 테토라 군 아침에 히나타 군에게 고백하는 거 멋지더라…. 아무리 생각해도 두 사람의 이야기를 몰래 들었다는 것에서부터 탈락이 아닐까. 으…. 어떻게 해야 좋은지 모르겠다. 아마 테토라도 진심을 담아 한 고백을 다른 사람이 들었다고 하면 기분이 상하지 않을까. 평화를 위해 모른 척하고 있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만약 말을 꺼내는 자체가 테토라 군의 아픔을 건드리는 꼴이 된다면 어떡하지? 히나타의 대답이 테토라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어서 두 사람의 관계가 더 나빠졌다거나 어색해졌다면? 뭐라고 위로를 해줘야 하는 건지, 또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건지…. 미도리가 생각의 늪으로 점점 빠져든다. 세상은 왜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걸까. 오늘도 우울하다. 원하는 것만 하면서 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미도리 군? 괜찮은 검까? 무슨 고민이 있으면 편하게 말해주십셔!”
“아… 응, 아니야…. 귀찮게 해서 미안… 자리로 돌아갈게….”
바닥으로 떨어진 미도리의 시선이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아-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쉰 미도리가 한 발자국 내쉬는 순간,
“저기 미도리 군!”
“응…?”
테토라의 목소리에 미도리가 고개를 돌려 테토라를 쳐다본다. 미도리를 쳐다보며 가볍게 씩- 웃는 표정이 쓸데없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오늘따라 표정이 여유로워 보인다.
“혹시 그 일 때문이라면… 신경 써줘서 고맙슴다! 전 괜찮으니까여!”
“아….”
“미도리 군도 일주일 동안 당번 활동하냐고 고생 많았슴다! 방학에도 유성대로 들어온 의뢰가 많이 있으니까 같이 힘내보자구여!”
아니… 그건 좀…. 테토라의 목소리가 참 기운차다. 이럴 때도 참 테토라답달까. 그리고 오히려 미도리가 위로받은 느낌이 들어 더 미안하기도 했다. 이러려고 찾아온 건 아니었는데. 머쓱하지만 또 고맙기도 해서 고개를 끄덕인다.
“그… 테토라 군도 항상 고생 많아.”
“아직 갈 길이 멈다! 제 목표는 누가 봐도 멋진 남자 중의 남자가 되는 거니까여!”
미도리의 대답에 당차게 포부를 밝힌 테토라가 낯설지 않다. 툭하면 말하는 그 목표가 지겹지도 않을까 싶었지만 어쩌면 목표를 되새기면서 더 노력하자 자신을 응원하는 소리가 아니었을까. 나 지금 답지 않게 되게 추상적이었던 것 같아…. 아마 아침에 들었던 테토라의 멋진 모습에 감동한 걸지도 모르겠다.
미도리를 생각에서 깨워주듯 익숙한 종소리가 들린다.
“나, 갈게….”
“아, 수업 끝나면 짧게 유닛 미팅이 있을 것 같은데 괜찮슴까?”
“음… 얼마나 짧게…?”
“한… 20분이면 될 것 같슴다!”
“응, 알겠어….”
테토라에게 짧게 인사한 미도리가 몸을 돌려 자리로 돌아간다. 이번 시간은 영어였나…. 외웠다고 생각했던 시간표의 순서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아 눈만 데구루루 굴려 옆 책상에 붙어있는 시간표를 몰래 확인한다. 영어 맞네…. 영어도 좋아하는 과목은 아니었던지라 기운 빠지기는 하지만. 그 후로 갈 곳을 잃은 시선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테토라에게로 향한다. 턱을 괴고 옆에 있는 창 너머로 운동장을 바라보면서 예쁘게 입꼬리를 당겨 웃는 모습이라니. 그대로 미도리도 홀린 듯 창 너머로 시선을 던져본다. 창틀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큰 키가 이럴 때는 도움이 되는 듯하다. B반의 체육 시간인가…? 토모야와 하지메가 어깨를 돌리며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고, 또 미츠루와 함께 폴짝폴짝 뛰는 히나타…. 아. 테토라와 창 너머를 번갈아 보던 미도라가 한참 동안 눈만 깜빡이다 겨우 시선을 돌린다. 아, 교과서 꺼내야 해…. 책상 아래, 손을 넣어 영어 교과서를 찾아본다. 카페테리아와 매점에서 받은 영수증이 뭉쳐져 있는 것이 잡히기도 하지만. 두껍지도 그렇다고 얇지도 않은 영어 교과서를 꺼낸다. 모국어처럼 편하지 않은 언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마 테토라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 또한 미도리가 단번에 알 수 없는 그런 느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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